나는 가끔 산수(山水) 아닌 것에서 산수를 만난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던져져 있는 무엇과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지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멍하니 초점을 흐리고 있다가 문득 떠오르는 형상이며 기억의 아지랑이이다.
- 2001. 작가노트 중 -
동시대 미술의 작가와 작품들을 보면 그것들이 통상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주제의 공통적인 특징이 발견된다. 그 특징은 오늘날 급증하고 있는 정례적 국제미술행사에서 더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러한 특징의 정형화가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특별한 예외들이 존재한다. 배종헌의 작품이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배종헌의 작업은 일정한 형식이나 소재를 중심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의 작업은 한 개인의 일상적 삶의 조건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상황들을 의미론적으로 직조하여 제시함으로써 그 안에 내재한 다양한 맥락들을 사유할 수 있는 경험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일상의 편린들은 그의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기능한다.
배종헌의 작품은 은폐되어 있지는 않지만 적당히 가려진 장소의 구석에서 채집되어 새로운 맥락으로 둔갑한 것이기도 하고, 때론 그러한 채집의 지난한 과정 자체를 기록한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작품이 형식적인 특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은 곧 형식의 구애로부터 벗어나 종횡무진하는 상상력을 자유로운 구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악의 없는 농담처럼 유쾌한 그의 작업들이 향하고 있는 세상의 문제들은 사실 그리 녹록치 않은 것들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일상의 영역에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분열증적 현상들과 같은 구체적인 주제에 닿아 있거나, 삶의 결정론적 구조를 부정하고 유동하는 삶의 전개과정 자체를 본질로 인식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같은 추상적인 대상에 발을 걸치고 있기도 하다.
배종헌의 작품이 동시대의 중요한 맥락들을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 내재한 반신반의의 유머를 놓친 채 개념적 분석에만 집중하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읽어내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일상의 시공간속에서 기능하는 다양한 구조들이 본질적으로 신체를 포획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그의 작업은 그러한 장력에 대응하는 유연한 미끄러짐이기 때문이다.
고원석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