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DISE  ZIP

I. 공간과 기억

집과 파라다이스 ZIP

특정 장소에 가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 장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고, 그 장소와 유사한 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 다. 기억은 개인마다 주관적으로 저장되어 재구성되며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복원되어 재생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기억은 실재가 아니며 시공간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것이다. 홍범은 이런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에 관한 작업을 하는 작가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특정 공간, 즉 집을 소재 로 그 기억을 저장하고 재구성하고, 기억해내는 과정과 형식, 방법을 영상, 설치 및 드로잉 작품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파편화되고 분절 화되어 있는 유년의 기억들에 대한 고착과 그 기억들이 재생산되는 과정을 작품에 담아냄에 있어, 작가는 수 없이 다양한 기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조건을 가지고 그 기억의 과정을 뜻하는 어떤 구조를 상정해 그 기억들이 영향을 끼치는 과정에 집중하여, 각각의 기억이 어떻게 재 생산되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80여년이라는 시간의 아우라가 담겨있는 파라다이스 ZIP도 누군가에게는 홍범과 같은 기억을 담고 있는 집이었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집의 기본 적인 골격만이 남아, 다른 모습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되어 시간과 기억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작품으로 표현되고 있는 작가의 과거 기억이 타인의 집이었던 파라다이스 ZIP이라는 현재의 공간에서 새롭게 적용되어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고 있다.



II. 오래된 외면

장소의 외면은 오랫동안 외면되어 왔다.

전시 제목 ‘오래된 외면’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겉모습의 외면이다. 공간의 겉모습들은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중요한 단서이자 배경이며, 기억을 포함한 내면을 의식 상에 남게 하는 구조이다. 외면은 다른 공간에서 그전에 경험했던 공간을 떠오르게 하는 연결 고리가 되며 그렇게 연결된 공간 인식은 공간 자체의 내면과의 교류까지 확대된다.

두 번째 의미는 마주치기를 꺼려 피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도외시함의 외면이다. 어린 시절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을 차지하고 있는 어느 한 공간은 친숙하고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오히려 무시되고 잊힌다. 그러나 그 공간이 없어지고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상실감이 든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 공간에 대한 의도치 않은 외면과 오랫동안 외면되었던 그런 장소에 관한 것이다.